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상하이 전투 (문단 편집) === 장제스의 증파 결정 ===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Shanghai1937KMT_machine_gun_nest.jpg|width=100%]]}}}|| || 상하이 [[국민혁명군]]의 기관총 진지 || 한편 장제스는 8월 16일 장시성 주석 슝스후이와 신임 군정부장 천청을 상하이로 파견하여 정확한 전황을 알아올 것을 지시했다. 천청과 슝스후이는 중국군이 일본군을 포위하기는 했으나 중국군의 병력이 이들을 섬멸하기는 충분치 않으며 예비대와 화력의 부족으로 더 이상 공세를 지속하기 어렵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하지만 20일에 난징에 돌아온 두 사람의 결론은 달랐다. 슝스후이는 열세로 인하여 더 이상 공격할 수 없다고 했으나 천청은 이를 인정하면서도 공격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보고를 올렸다. >"공격할 수 있느냐 공격하지 못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공격이 필요하냐 필요하지 않느냐의 문제다. 적이 남구를 공격하려 하고 동시에 우리 또한 반드시 방어하고자 하니 화북에서 전투는 확대되어 이미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만약 적이 화북에서 우세해진다면 반드시 그 기동부대를 이용, 평한성을 따라 남하하여 곧바로 우한에 다다르게 될 것이다. 우한을 방어하지 못한다면 중국전장은 종심이 2개로 끊어져 우리가 불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송호전장을 확대하여 적을 송호전장에 끌어들일 수만 있다면 [[1936년|민국 25년]]의 예정된 전략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말을 들은 장제스는 흥분하여 "공격! 공격! 반드시 공격해야지!"라고 외쳤고 천청은 "만약 공격해야 한다면 상하이로 병력을 증강시키는 것이 필요하다."라고 건의했다. 장제스는 이를 수락, 화북으로 가야 할 주력부대들을 포함한 중앙군을 상하이로 급파했다.[* 그 이전까지 중화민국 정부는 항일 총력전을 위해 소집한 100만 대군 중에 75만 명을 화북 전선에 할당하는 등 화북을 주전선으로 삼고 있었다.] 8월 20일 강소성 남부에서 절강성을 포함하는 제3전구가 수립되어 장제스가 직접 전구 사령장관에 앉았고 전쟁 계획이 수립되었다. 한편 8월 21일 중국은 소련과 불가침 조약을 체결하고 [[바실리 추이코프]] 장군을 비롯한 3백명의 군사 고문단을 받아들였다. 또한 1억 달러의 차관과 1억 5천만 달러에 해당하는 무기들도 지원받았다.[* 한때 중국과 소련은 장제스의 반공 정책과 중국의 외교 단절로 인해 사이가 좋지 못했으나, 1930년대 중반부터는 다시 사이가 좋아지기 시작했다. 소련은 중국을 많이 지원해주었으나 일본과 소련이 불가침 조약을 맺은 후부터는 급격히 줄어들었고(소련이 중국을 지원해준 이유가 중국을 이용해 일본을 견제하기 위함이었으므로) 독소전쟁이 시작되자 완전히 끊기게 된다.(자기들이 써야 하니까)] 그리고 [[중국공산당]]을 정식으로 인정하고 홍군을 국민혁명군 제8로군으로 개편하였다. 8월 23일 미국 국무장관 [[코델 헐]]이 중일 양국에 공식성명을 통해 정전을 호소했지만 중국에 대한 도의적 지지 이상은 표명하지 않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